그루지아에 대해서 (펌)

공식명칭 : 그루지야(Georgia)
인구 : 4,474,000 명

면적 : 70,152 km2

수도 : 트빌리시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공식언어 : 그루지야어

독립년월일 : 1991. 4. 9

화폐단위 : 그루지야라리(Georgian lari)

 

개요

과거에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가운데 하나이다. 흑해 동남해안을 끼고 있으며, 카프카스 산맥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터키, 동남쪽과 남쪽으로 아제르바이잔 및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그루지야 내의 아브하지야·아자르 자치공화국에는 주로 비(非)그루지야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수도는 트빌리시이다. 면적 69,700㎢, 인구 4,934,000(2003 추계). 

자연환경

그루지야 대부분의 지역은 산악지대로, 카프카스 산맥에 속하는 봉우리들의 평균 높이가 4,600m 이상에 이른다. 카프카스 산맥이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고 흑해의 영향을 받아 기후는 온난하다. 그루지야 서부에서는 습윤한 아열대성 해양기후가 나타나는 반면, 동부는 온대성 습윤기후에서부터 건조한 아열대성 기후까지 다양하다. 흑해 연안에 비옥한 콜히다 저지가 있으며, 리오니 강과 잉구리 강이 그곳을 지난다. 

국민

그루지야인들은 처음부터 카프카스 산맥 주변에 정착한 민족으로 추측되며, 4세기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6세기부터 여러 봉건국가들이 이 지역에 세워졌으나 13세기에 몽골을 비롯한 이민족들에게 침략당하면서 500만 명에 이르던 인구가 크게 줄어드는 대참사를 겪었다. 19세기초 러시아에 합병되었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인구가 13세기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인구의 2/3를 차지하는 그루지야인(그들 자신은 카르트벨레비라고 함)들은 카르트벨리야어족(남카프카스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며, 대부분이 그루지야 정교회의 신자이다. 소수민족으로는 아르메니아인(약 8%), 러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 등이 있다. 

경제

공업이 발달했으며 수력발전·광업·기계산업 등이 특히 활발하다. 석탄, 망간, 비금속계 광물이 채광되며 1956년부터는 철도 생산되고 있다. 전동차·대형차량 및 토목공사 장비를 비롯하여 선반·정밀기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이 생산되며 무기질비료·합성섬유·의약품 등의 화학공업도 이루어진다. 그밖에 면·모·실크 등의 천연섬유와 그것을 소재로 한 의복이 생산된다. 그루지야의 농지는 부족하고 경작하기도 어려워 홍차·감귤류·포도·사탕무·담배 등 노동집약적 농업에 적합하다. 이밖에 교통 기반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다. 

정치·사회

1990년 복수 정당의 참여가 보장된 가운데 자유총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는 비공산당 연합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들은 1991년 그루지야의 독립을 선언했다. 1992년 그루지야는 1921년에 제정된 소비에트 시대 이전의 헌법을 복원시켰다. 같은 해 헌법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행정부 권한의 허용범위에 관한 오랜 논쟁 끝에 1995년 새 헌법을 채택했다.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이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하며 총리와 내각을 임명한다. 입법부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235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최고회의이다. 사법부는 지방·시 법원과 최고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1980년대까지 소련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그루지야 공산당이 유일 정당으로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점차 고조되는 민족주의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개혁 정책에 힘입어 많은 정치집단이 등장했다. 현재 주요 정당으로는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이 결성한 그루지야시민연합, 개혁 성향의 국민민주당, 그루지야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1989년에 결성된 그루지야인민전선, 1893년에 결성되었다가 그루지야의 소련에 병합으로 해산되었던 그루지야사회민주당 등이 있다. 

그루지야는 최고 수준의 의료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온천으로 유명하다. 중등교육까지는 무상 의무교육이며, 각 단계마다 높은 진학률을 보인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그루지야어를 사용한다. 대표적인 고등교육 기관으로 1918년에 설립된 트빌리시국립대학교가 있다. 많은 신문·정기간행물이 발행되고 있는데 대부분 그루지야어를 사용한다. 라디오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몇몇 소수민족 언어로, 텔레비전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러시아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

그루지야는 오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4세기에 문자가 만들어졌고, 5세기부터 그루지야 특유의 문학이 나타났다. 그루지야인·그리스인들에게 수사학을 가르친 고대의 고등교육 기관이 그루지야 중부의 콜치스에 있었으며, 중세에는 중세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인 이칼토·겔라티의 학당들이 12세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파했다. 12세기에는 그루지야인의 민족 정신을 잘 표현한 시인 쇼타 루스타벨리의 민족 서사시 〈표범 가죽을 입은 기사 Vepkhis-tqarsani〉가 나왔다. 그 후 18세기에 작가 술칸-사바 오르벨리아니, 소설가·시인·극작가 일리아 차프차바제 등이 나타났다. 19세기에는 극작가 기오르기 에리스타비가 근대 그루지야 연극을 확립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서정시인 아카키 체레텔리, 카프카스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카즈베기, 자연시인 바자 프샤벨라 등이 활동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그루지야 출신인 스탈린이 소련을 통치하고 있을 때 많은 작가들이 수난을 당하는 가운데 소설가 미헤일 자바히슈빌리, 시인 티치안 타비제가 처형되고 시인 파올로 이아슈비리는 정부의 비판을 받고 자살했다. 1987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텐기즈 아부라제 감독의 영화 〈후회 Repentance〉는 당시의 억압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루지야는 연극과 건축 문화의 전통을 자랑한다. 그루지야 연극은 유럽과 기타 지역의 연극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쳐 온 왔으며, 아르메니아 건축과 더불어 비잔틴 양식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그루지야의 건축문화는 오늘날 많은 수도원·교회 등의 대형 건축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많은 신문·정기간행물이 그루지야어로 발행되고 있으며 라디오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몇몇 소수민족 언어로, 텔레비전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러시아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

그루지야 일대에 처음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목축과 농업에 종사하던 부족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콜치스 라고 알려진 전설적인 부(富)의 땅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까지 알려졌다. BC 65년에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고,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AD 337년 이후 3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간의 분쟁에 휘말렸다. 654년 이후 아랍의 칼리프들이 이 일대를 다스렸는데, 그들은 티플리스(트빌리시) 시를 거점으로 토후국을 건설했다. 8세기 말부터 12세기까지 아르메니아에서 기세를 떨쳤던 바그라티드 왕조가 그루지야인들과 카프카스 혈족이 살던 이 지역을 통일했다. 바그라트 3세(975∼1014)는 그루지야 동부와 서부의 모든 공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루지야는 타마라 여왕의 재임(1184∼1213) 동안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서 북서쪽으로 체르케스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범(汎)카프카스 제국을 이루면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범카프카스 제국이 몽골의 침략을 받은 1220년부터 그루지야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386∼1403년에 티무르의 맹공격을 받고 경제적·문화적으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타격을 입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함락되면서 그루지야는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와 교류할 수 없게 되었고, 그후 3세기에 걸쳐 투르크와 페르시아인들의 계속되는 침공에 시달렸다. 1783년 러시아와 그루지야 조약을 맺어 독립을 보장받는 대신 러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으나, 1795년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았을 때 러시아로부터 원조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1801∼64년 그루지야 내의 왕국들은 차례로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모든 외부세력으로부터 보호하여 그 실체가 말살되는 것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 킵차크 한국).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그루지야는 1917∼21년에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배권에 속하는 자카프카지예라는 이름의 나라에서 자카프카지예 독립국으로, 이어 그루지야 독립국이 되었다. 그루지야 독립국은 처음에는 독일 보호령이었으나 이어 영국에 점령되었다가 1920년 1월 사실상 독립했고, 1921년 연합국으로부터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1921년 2월 적군에 의해 소비에트의 지배를 받는 자카프카지예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1936년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대체되면서 소련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990년 그루지야 역사상 최초로 복수 정당이 참여한 가운데 자유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독립을 기치로 내세운 비공산 연합이 승리해 정권을 잡았고, 1991년 4월 9일 그루지야는 마침내 독립을 선언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선거에서 승리한 즈비아트 감사후르디야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감사후르디야의 권위적 통치는 지지세력의 반발을 초래했고, 1991년 말에는 내전이 발발했다. 결국 감사후르디야는 1992년 1월 대통령직에서 축출되고, 3월에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소련 외무장관 출신의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그의 뒤를 이었다. 그루지야는 1992년 국제연합(UN)에, 1993년 독립국가연합(CIS)에 가입했다. 

1992년 북서쪽에 위치한 아브하지야 자치공화국이 분리 독립을 선언하자 그루지야 정부가 군사적 대응에 나서면서 그루지야는 내전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1993년 7월 러시아의 중재로 양측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이에 따라 UN 그루지야 정전감시단(UNOMIG)이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아브하지야 자치공화국 및 남오세티아 내의 분리 움직임과 다른 내부적 위협들에 대처하는 한편, 미국·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신생 공화국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과의 관계 

그루지야는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듬해인 1992년 12월 14일 한국과 수교조약을 맺었다. 양국은 현재 각각 주러시아 대사에게 공관 업무를 겸임케 하고 있다. 한국은 특히 1994년 10월 대위·소령급 장교 5명을 UN 평화유지활동(PKO)의 일환으로 그루지야에 파견했으며, 1999년 4월 현재 군 옵서버 3명이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1997년 현재 그루지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수는 교민 250명, 체류자 5명이다. 아직까지는 양국간 무역이 활발하지 않지만 그루지야는 한국으로부터 의료기기, 설탕, 과자류, 플라스틱 제품, 의류 등을 수입하고 있다.

by 이정훈 | 2008/07/25 21:45 | 2. 우크라이나/그루지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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